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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소설: 머물지 않는 바람

골방이야기꾼 2022. 9. 16.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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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소설: 머물지 않는 바람

머물지 않는 바람

들판이 진득한 피를 흘리고 있었다.

적어도 사내가 보기엔 그러했다.

이곳의 저녁노을은 유달리 검붉었다.
세간에 떠도는 말로는 이 땅에서 피를 흘리며 죽은 사람이 너무 많아, 그 피가 땅 속에 스며들지 못하고 바람에 섞여 맴도는 것이라 한다.


이 불길한 곳에서도 사람들은 아무 거리낌 없이 들판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들이 뭘 하는지는 몰라도, 사내가 보기엔 저승으로 가지 못해 방황하는 영혼 같았다.

“저거, 돈이 꽤 짭짤하지.”

사내는 창문 너머로 두던 시선을 거두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 녀석들이 할 일이 없어서 저러고 있는 것 같나?”

낡은 소파에 앉아있던 늙은이가 비아냥댔다. 사내가 이곳에 잠시 머물 수 있도록 허락할 땐 언제고, 이제 와서 싫은 티를 내고 있다.

“씨앗을 뿌리는 거, 아닙니까?”

“풀도 자라지 않는 메마른 땅에? 자네 부모가 자식 하나 귀하게 키우셨군.”

부모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사내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노인은 계속해서 사내를 툭툭 건드렸다.

“딱 보면 알지. 굳은살 하나 없을 것 같은 곱상한 얼굴을 하고 추레하게 입으면 누가 속을 줄 알았나?”

노인은 사내의 외양을 지적했다.

그 말대로, 사내가 내뿜는 분위기는 어딘가 기묘했다. 이목구비는 뚜렷하지만 눈매가 순하고 둥글둥글하며, 몸뚱이에선 사냥꾼 특유의 풀 냄새가 나지만 얼굴에서는 귀족들이 먹는 흰 빵 냄새가 났다.

“전 당신을 속인 적이 없습니다. 절 싫어하신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내쫓으려도 됩니다.”

“정확히는 너희 같은 샌님들을 싫어하지. 평소에는 온갖 점잖은 척은 다 하다가, 국가가 위태로우면 제일 먼저 도망가는 놈들이니.”

“저는 사냥꾼이라 말씀드렸잖습니까.”

“네 말을 믿으라고? 내가 나이를 허투루 먹은 줄 아나?”

노인이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비록 노쇠했지만 노인의 체구는 여전히 싸움소처럼 단단하며 거대했다.

“나는 전사였고, 지금은 사냥꾼이다. 너희 샌님이 백날 이야기를 지어내봐야 내 앞에선 모두 하찮은 삼류 소설일 뿐이야.”

삼류 소설이라는 말에 사내가 발끈했다.

“방금 삼류 소설이라고 하셨습니까?”

노인이 대답 대신 턱으로 식탁을 가리켰다.

“식사를 한 뒤에 이야기해볼까? 네 소설이 얼마나 허무맹랑한지 말이야.”

“지금 당장, 제 말에 대답해주십시오.”

“어딜 감히 명령하는 거냐?”

노인의 목소리가 그르렁거렸다.
마치 어린 양을 노리는 늙은 늑대처럼.

“너희 집에서는 네가 왕일지라도, 이 집에선 내가 왕이고 대칸이다. 그러니 배를 채워라.”

“…….”

“나는 네가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다. 허나 너는 일단 내 손님이니, 예우를 갖춰주마.”

“만약 제 말에 틀림이 없음이 밝혀지면, 그땐 어떻게 하실 겁니까?”

하! 하고 노인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내 오랜만에 너처럼 배짱 좋은 사기꾼을 만났구나.” 

노인은 입가에 웃음을 머금은 채, 먹이를 눈앞에 둔 맹수처럼 거만하게 굴었다.

“좋다. 네 이야기가 전부 사실이라면 내가 소원을 하나 들어주지. 그러나 거짓으로 밝혀지면, 넌 네가 가진 모든 걸 내려놔야 한다.”

“좋습니다.”

사내도 물러설 기미가 없었다.

사내와 노인은 잠시 서로를 노려보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함께 식탁으로 향했다.

-

노인이 준비한 저녁식사는 수프와 감자였다.

수프는 버섯과 옥수수가 어우러져 고소했다. 감자는 수프 국물 사이에 부드럽게 섞여 금방이라도 녹아들 듯 했다.

다 쓰러져가는 오두막에서 내온 식사치곤 훌륭하지만, 사내는 심기가 영 불편했다.

“귀한 자식이라 입맛에 안 맞았나?”

사내의 표정을 살펴보던 노인이 빈정댔다.

“아까 절 믿지 못하겠다고 하셨죠.”

“그래, 난 널 믿지 않는다.”

“이제 식사를 끝마쳤으니, 하던 이야기를 마저 하는 게 어떻습니까?”

“그래, 좋다. 네가 원한다면.”

스윽-!

노인이 자기 앞에 놓인 식기를 옆으로 밀어냈다. 사내 역시 조심스레 식기를 정리했다.

“…….”
“…….”

식탁을 사이에 두고, 남자와 노인이 가만히 서로를 노려보았다.

“네가 그랬지? 자네 아버지는 유목민이셨고, 이곳에서 마왕과 싸우다 돌아가셨다고. 그래서 아버지의 유품인 도끼를 찾으러 이곳까지 왔다고 말이야.”

“그렇습니다.”

“그게 왜 말이 안 되는지 이야기를 해주마.”

노인은 목청을 가다듬은 다음, 눈을 감고 옛 이야기를 떠올렸다.

이윽고 노인이 눈을 떴을 때, 노인의 눈가엔 알 수 없는 회한이 아른거렸다.

“……10년 전 이곳에서 마왕 ‘고타이’의 운명이 결판났다. 문명 세계를 모조리 잿더미로 만들려는 녀석의 움직임이 여기서 끊어졌다.”

탁-!

노인은 마치 장기를 두듯, 술잔을 자기 앞에 강단있게 내려놓았다.

“고작 500명도 안 되는 유목민이 세계 최강의 군대와 싸워 1달 동안이나 버텼다. 불곰의 발목이 토끼에게 붙잡힌 격이었다.”

공국도, 왕국도, 제국도 무너졌다. 마왕의 군대는 그 어떤 국가의 군대보다 날렵하며 강인했다.

그러나 그들은 몰랐다. 이곳에서 자신들보다 더 빠르고 강인한 상대를 만나게 되리라곤…….

“너희 문명인들은 그들을 ‘야만족 투구’라는 뜻의 ‘보르단’이라 부르지만, 본래 이름은 따로 있다. 그게 뭔지 아느냐?”

노인이 사내에게 질문을 던졌다. 물론 단순한 질문이 아니라, 일종의 시험이었다.

“알루가이 족입니다.”

사내는 첫 번째 시험을 간단히 돌파했다.

“그래, 저번에 찾아온 놈도 그 정도는 익히 알더군.”

노인 역시 사내가 쉽게 맞추리라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여하튼, 그 알루가이 족은 끈질기게 마왕을 괴롭혔다. 보급로를 끊고, 간부를 죽이고, 병사들의 밤잠을 방해했다. 그 움직임이 귀신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사내는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무미건조했고, 그 모습을 보던 노인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어차피 이런 이야기, 별로 궁금해 하지도 않겠지. 어차피 네놈이 원하는 건 도끼니까.’

언제부터인가 세간에 이상한 소문이 퍼졌다. 이곳, 니림 평야의 어딘가에 살고 있는 노인이 소원을 이뤄주는 도끼를 가지고 있다고.

그 소문을 듣고 한 달에 한번 꼴로 사람이 찾아왔다. 누군가는 강제로 노인에게서 도끼를 빼앗으려 했고, 누군가는 도끼가 원래 자신의 소유인양 사기를 쳤다.

그러나 힘도 세고 눈치도 빠른 노인에게는 모두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너도 분명 그 얼간이 중 하나겠지. 때마침 무료하던 참이니, 적당히 놀아주다 보낼 테니 그렇게 알아라.’

노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평범한 놈이라면 화를 참지 못하거나, 집착하거나, 깔끔하게 포기하던가 하겠지만, 마왕은 역시 마왕이었어. 그는 알루가이 족을 직접 만나 자기 밑으로 들어오라 권유했어.”

스윽-!

노인이 사내를 향해 얼굴을 바싹 내밀었다.

“하지만 알루가이 족은 마왕보다도 더했지. 왜 그런 줄 아나?”

“……저에게 물어보시는 겁니까?”

사내의 목소리가 약간 흔들렸다. 다른 이유는 없었으며, 그저 당황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노인은 사내가 다른 생각을 하느라 자신의 말을 제대로 귀담아 듣지 않았으리라 생각했다.

“아니, 아니지. 난 다른 걸 물어보려 한다.”

노인은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사내를 쫓아내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는 회심의 미소와 함께 질문을 던졌다.

 “너는, 알루가이가, 뭘 뜻하는지, 아느냐?”

음절 하나하나가 노인의 혓바닥에서 완전히 뭉개졌다. 노인의 목소리는 바위처럼 무겁고, 돌풍처럼 휘몰아쳤다.

진짜 늑대인지, 혹은 늑대의 탈을 쓴 양인지, 이 질문이 모든 걸 판가름하게 될 터였다.

 “얼른 대답해라.”

여느 사냥꾼과 달리, 노인에게는 참을성이 부족했다. 그러나 사내는 노인이 재촉하는데도 어째선지 대답하지 않았다.

“모르는 거냐?”

노인이 엄중하게 되물었다. 사내는 곰곰이 생각한 다음에야 비로소 입을 열었다.

“……저희 아버지는 알루가이의 전사로써 이곳에서 싸우다 돌아가셨습니다. 그 와중에 어머니께서도 마왕의 습격을 받아…….”

“내가 물어봤던 건 네 같잖은 소설 따위가 아니다!”

쾅!

노인이 두 주먹으로 식탁을 내리찍었다.

“정녕 네가 죽고 싶은 거냐? 네 거짓말쟁이 부모가 그렇게 말해도 된다고 시켰느냐?”

노인은 사내가 자신을 약 올리는 거라 생각하여 머리에 핏발을 세웠다.

스윽-!

노인은 품속에서 단검을 꺼낸 다음, 사내의 목울대를 지그시 겨냥했다. 

“나는 전사였다. 비록 지금은 늙었지만, 너 같은 애송이 따위는 지금 당장 숨통을 끊어놓을 수 있다. 내가 허풍을 부리는 거라 생각하면, 지금 이 자리에서 증명해주마. 난 너처럼 달리 거짓말쟁이가 아니니까.”

그러나 사내는 두려워하는 기색 하나 없이 말을 이어나갔다.

“……어머니는 언젠가 제가 아버지의 무기를 이어받아 알루가이 족을 부흥해야 한다는 유언을 남기셨습니다.”

“언제까지 날 우롱할 셈이냐!”

노인의 인내심이 서서히 바닥을 드러냈다.

 “알루가이 족은 이곳에서 모두 죽었다!”

노인은 이제는 어둑어둑해진 창문 너머를 거칠게 삿대질하며 소리를 질렀다.

“네가 방금 전 보았던 자들은 장사치들이다! 주인을 잃어버린 무기를 팔아치우려는 역겨운 작자들이지. 그런데 그거 아나? 너도 저 놈들과 별반 다르지 않아. 죽은 자를 이용해서 이득을 취하니까. 이 역겨운 쥐새끼야!”

그러고선 언제 화를 냈냐는 듯, 입 꼬리를 스윽 올렸다.

“네가 진짜 알루가이 족의 후예라면. 어디 이걸 한 번 피해 봐라. 만약 네가 가짜라면, 네 검도 곧 주인을 잃겠구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단검이 사내를 향해 빠르게 돌진했다.

턱-!

“……!”

그러나 단검은 사내의 목을 꿰뚫지 못했다. 눈 깜짝할 새에 사내의 손이 단검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사내는 단검의 날 부분을 손에 쥔 채, 낮은 어조로 말하기 시작했다.

“저희 어머니는 유언과 더불어 제게 이런 말을 남기셨습니다.”

“……뭐?”

“알루가이 족의 진짜 의미를 가르쳐주겠다. 너는 아직 성인이 아니라 자격이 없지만, 곧 우리 부족은 멸망할 테니 정령께서도 이해해주실 것이다. 죽을 때까지 네가 누구인지 잊지 마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내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말도 안 된다. 이럴 리가 없다.”

노인은 애써 부정했다. 그러나 사냥꾼이자 전사로써, 그의 동물적인 육감이 귀에다 대고 속삭이고 있었다.

‘저 자는 지금 진실을 말하고 있다.’

노인은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아니, 넌 아직 알루가이가 무엇인지 내게 말해주지 않았다. 현란한 말솜씨로 날 놀리지 마라.”

“바람…….”

“……!”

노인이 부들부들 떨었다.

늙어서 둔해진 심장이 야생마의 그것처럼 미쳐 날뛰었다. 느리게 흐르던 피가 기병대의 공격처럼 빠르게 혈관 속을 내달렸다.

지금까지 수많은 이가 도끼를 얻으려 이곳을 드나들었지만, 그들의 입에서 단 한번도 ‘바람’이란 말을 듣지 못했다.

“다시 말해봐라. 방금 뭐라고 했나? 알아듣기 쉽게 똑바로 말해라. 당장!”

“알루가이의 본래 뜻은, ‘머물지 않는 바람’입니다.”

땡그랑-!

그 말을 듣자마자 노인은 손에 힘이 풀려 그만 단검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사내는 10년 전 학살의 생존자였다.

“그럼 네가, 진짜 알루가이 족이란 말이냐?”

“예, 그렇습니다.”

사내의 목소리는 확신에 차 있었다.

“하지만 네가 10년 전 그 학살에서 살아남았다 하더라도, 네게 도끼를 내어줄 순 없다.”

“왜 그렇습니까?”

“알루가이 족은 위대한 전사일수록 사정거리가 짧은 무기를 쓴다. 활은 누구나 쏘지만, 대개 젊어서는 창을 다루고 노련해지면 칼과 방패를 든다. 그럼 도끼는 어떻겠느냐?”

도끼는 사정거리가 짧다. 칼이나 창은 길게 찌를 수 있지만 알루가이 족의 도끼는 무조건 베어야 한다. 그렇게 설계되어 있다.

“도끼는 알루가이 중에서도 제일 강한 자. 즉 부족장만이 사용할 수 있다.”

말을 끝마친 노인이 문득 생각했다.

‘도끼는 부족장의 것이다. 그런데 저 녀석은 아버지의 유품인 도끼를 찾으러 왔다고 했다. 그렇다면…….’

노인이 사내에게 물었다.

“혹시 네 이름이 ‘베룬’이냐?”

사내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재차 물었다.

“네가 타이간의 아들이자 부족의 후계자인 ‘베룬’이 맞느냐? 산과 대지와 바람의 정령에 맹세하건대 네가 정녕 ‘베룬’이 맞는 것이냐?”

“저희 아버지의 이름은 ‘타이간’이고, 저희 어머니의 이름은 ‘네야’입니다. 저는 산과 대지와 바람의 정령에 맹세하건대 부모님에게 ‘베룬’이라는 이름을 받았습니다.”

노인은 그 자리에서 어린아이처럼 울었다.

“정령의 신께서 아직 알루가이를 기억하고 있었구나.”

베룬 역시 노인이 알루가이 족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고는 눈물을 훔쳤다. 10년 동안 한 번도 보지 못한 동족을 비로소 마주하게 되었으니 반가운 마음을 감출 길이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만남은 오래 가지 못할 운명이었다.

“내가 곧 도끼를 내어줄테니, 그걸로 내 목을 쳐라.”

“예?!”

베룬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의 얼굴은 새벽녘의 만년설처럼 창백했다.

“무엇 때문에 목숨을 끊으려 하십니까? 왜 저에게 동족을 죽이라는 부탁을 하십니까? 이 부탁이 알루가이의 관습에 어긋난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잖습니까?”

“그래서 부탁하는 것이다.”

“전 아직 이해를 못하겠습니다.”

노인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내가 네 아버지를 배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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